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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부분과 전체>인가?

<부분과 전체>는 20세기 초 양자역학 탄생에 주도적 역할을 한 하이젠베르크의 저서이다. 자연과학사엔 수많은 이정표가 있지만, 그 표지를 세운 사람이 직접 자신의 삶과 업적전반을 회고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부분과 전체>의 가치는 그 지점에서 더욱 빛난다.

 

그런데 왜 <부분과 전체 Der Teil und das Ganze>인가? 나는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다 읽었지만, 제목에 대한 언급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책의 영문번역본 타이틀은 <Physics and Beyond>이다. 아마 영문번역자는, 제목에 대한 원작자의 코멘트가 없었기에 굳이 원제목을 따를 필요가 없다 느낀것 같다.

 

유영미 번역가가 번역한 <부분과 전체> 한국어판에는 김재영 박사의 해제가 수록되어있는데, 해제 마지막 소제목이 바로 ‘왜 부분과 전체일까?’이다. 김재영 박사는 고대 그리스 철학이나 괴테의 자연철학 등을 통해 그 답을 설명하려 한다. 나는 <부분과 전체> 밖에 있는 그런 철학적인 이야기들에 대해선 잘 알진 못하지만, <부분과 전체> 제목의 의미는 <부분과 전체> 속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재영 박사는 ‘전체성 Ganzheit’ 이라는 말이 3장, 9장, 17장에 등장하며 그것이 제목에 대한 실마리라 설명하는데, 나는 <부분과 전체>의 의미는 특정 챕터가 아니라 책전반에 걸쳐 녹아있다 느낀다. 그리고 본문속에서 제목의 의미를 가장 잘 담고있는 단어는 ‘부분’이나 ‘전체’가 아니라 ‘연관’이라 생각한다.

 

<부분과 전체>의 부제는 ‘원자물리학을 둘러싼 대화들 Gespräche im Umkreis der Atomphysik’인데, 이 책은 하이젠베르크의 삶과 연구를 채웠던 대화를 중심으로 구성되어있다. 그리고 그 속에 종종 ‘전체’라는 단어가 쓰이는데, 이는 많은 경우 ‘연관’이라는 단어 혹은 ‘연관’을 뜻하는 표현과 함께 등장한다 :

 

가령 종이 위에 그려진 사각형을 본다고 해봐. 그럴 때 우리 눈의 망막이나 두뇌의 신경세포에도 그런 사각형이 있는건 아닐거야. 오히려 우리는 표상을 통해 감각적 인상을 무의식적으로 정리를 하는거지. 전체의 인상을 표상, 즉 서로 연관된 ‘의미있는’ 상으로 바꾸는 거야.  1장 원자 이론과의 첫 만남 (1919~1920) 中 하이젠베르크 친구 로베르트의 말

 

하지만 이론물리학을 한다해도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것들을 신중하게 다루어야 하는건 마찬가지야. 아인슈타안의 상대성이론이나 플랑크의 양자론처럼 철학에까지 미치는 그런 커다란 문제들을 논의할 때도 어느 정도 나아가면 많은 작은문제를 해결해야 하지. 그런 작은 부분들이 모여서 비로소 새로운 분야에 대한 전체적인상이 나오는법이야 2장 물리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다 (1920) 中 좀머펠트의 말

 

우리가 커다란 연관들을 생각한다면 미래에는 一보어의 상보성의 원리에서 볼 수 있듯이 — 중용을 취할 수밖에 없을거야. 이런식의 사고에 부응하는 과학은 다양한 형식의 종교에 더 관용적이 될 뿐 아니라, 전체를 더 잘 조망 할 수 있기에 가치의 세계에도 기여할 수 있을 거야. 7장 자연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대한 첫번째 대화 (1927) 中 파울리의 말

 

이런 다양한 형식을 상보적인 서술방식으로 이해해야 할거예요. 이런 서술방식은 서로 배제적이지만, 전체로서 비로소 인간과 커다란 연관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충만함을 전달하게 되는거예요. 7장 자연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대한 첫번째 대화 (1927) 中 보어의 말

 

비슷한 추상적 개념이 바로 극한개념입니다. 역시나 그에 대웅하는 것이 없고, 이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커다란 어려움에 빠지게 될지라도 무한은 현대수학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개념이죠. 따라서 수학에서는 번번이 더 높은 추상의 단계에 이르게 되고 대신에 더 커다란 영역들의 전체적인 이해를 얻게 됩니다. 우리의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자면, 종교에서 ‘존재한다’라는 말을 이와 마찬가지로 더 높은 추상의 단계 로 올라가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올라가는 것은 우리로 세계의 연관들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지만 그 이상은 아니죠. 그러나 우리가 어떤 정신적인 형식으로 이해하려 하든 간에 연관들은 늘 실재합니다. 7장 자연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대한 첫번째 대화 (1927) 中 하이젠베르크의 말

 

이런 과정에서 결국 단순한 자연법칙이 ‘탄생한다는것’, 또는 내가 좋아하는 표현에 따르면 ‘드러난다는 것’은 도 확신하고 있는 바였다. 그러나 방법적으로 그를 얘먹게 하는것은 각각의 출발점이지, 커다란 연관이 아니었다. 나는 디랙의 이야기를 들으며 디랙에게 물리학 연구란 등반가들이 어려운 바위산을 오르는 것과 같겠구나 하는 느낌을 종종 받았다. 즉 언제나 다음 3미터를 더 오르는 것만이 중요하고, 그렇게 한구간 한구간 전진하다보면 봉우리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전체의 등반 루트와 그에 따른 어려움들을 상상하는 것은 기운만 빠지게 할 뿐 쓸데없는 일이며, 그 밖에도 진정한 문제는 어려운지점에 다다라서야 비로소 알 수 있는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타입이 아니었다.

 

이런 비유를 고수하자면, 나는 전체의 등반 코스가 결정되 어야만 시작할 수 있는 타입이었다. 올바른 코스를 찾은 다음에야 비로소 개별적인 어려움을 극복 할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보기에 바위산 비유의 오류는 바위산이 정말 오를수 있는 산인지 결코 확신할 수 없다는 데에 있었다. 나는 자연 속의 연관이 결국은 단순하다는 것을 굳게 믿었다. 자연이 이해할 수 있게끔 만들어져 있다고, 더 적절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사고 능력이 자연을 이해할 수 있게끔 만들어져 있다고 확신했다. 이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전에 슈타른베르크 호숫가를 걸을 때 로베르트가 했던 말에 근거했다. 그때 로베르트는 자연을 이 모든 형태로 조성한 질서를 부여하는 힘이 우리의 정신 구조, 즉 사고능력의 구조 또한 만들었다고 말했던것이다.

 

폴과 나는 이런 방법적 질문에 대해, 앞으로의 과학의 전개와 관련한 희망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의 견해 차이를 약간 핵심적으로 표현해 본다면 대략 다음과 같았다. 폴은 “한 번에 한 가지 어려움만을 해결할 수 있어”라고 말했고, 나는 정확히 반대로 “한 번에 한 가지 어려움만을 해결할 수는 없어, 여러가지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밖에 없어”라고 말했다. 폴의 말은 자신은 여러가지 어려움을 한꺼번에 해결하고자 하는것을 주제넘은것으로 여긴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원자물리학처럼 일상적인 경험을 한참 벗어나는 영역에서는 한걸음 한걸음 전진하는것이 얼마나 고된작업인지를 생생하게 알고있기 때문이었다. 한편 내 말은 한가지 어려움을 진정하게 해결한다는 것은 그 자리에서 단순하고 커다란 연관을 만나는 것이라는 뜻이었다. 단순하고 커다란 연관에 다다르면 처음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다른 어려움들까지 없어진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폴의 발언과 나의 발언 모두 상당한 진실을 내포하고 있었다. 우리는 닐스 보어가 곧잘 하는 말을 떠올리면서 둘 사이의 모순을 가볍게 넘길 수 있었다. 닐스는 이 렇게말하곤했다 : “올바른 주장의 반대는 잘못된 주장이다. 그러나 심오한 진리의 반대는 다시금 심오한 진리일 수 있다.” 8장 원자물리학과 실용주의적 사고방식 (1929) 中 디락과 하이젠베르크의 대화

 

가령 나는 ‘삶의 의미’라는 말이 대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어요. ‘의미’라는 말은 늘 의미를 문제 삼는 대상과 의도, 표상, 계획 같은 것과 연관되어 있어요. 하지만 삶, 즉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 전체는 의미라는 말과 연관시킬 만한것이 없어요.”11장 언어에 대한 대화 (1933) 中 보어의 말

 

몇몇 학회에서는 구성원들에게 의무적으로 커다란 맥락은 논하지 못하게 하고 지엽적인 사실만을 다루도록 했어요. 그리하여 자연에 대한 이론적 숙고들은 개별적인 현상들만을 대상으로 했고, 전체연관은 도외시되었지요. 17장 실증주의, 형이상학, 종교 (1952) 中 보어의 말

 

뉴턴역학에서도 지엽적인 것을 세심하게 연구하면서 시선은 전체를 바라보는 것이 중요했어. 하지만 오늘날의 실증주의는 커다란 연관을 도외시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지. 내 비판이 너무 지나친 것인지 몰라도 커다란 연관을 의식적으로 오리무중 가운데 놓으려고 해. 최소한 그 누구에게도 커다란 연관을 생각하도록 고무하지 않아. 17장 실증주의, 형이상학, 종교 (1952) 中 하이젠베르크의 말

 

이런 방향에서 한 발자국씩 나아가면서 볼프강은 점점 더 열광상태에 빠졌다. 연구를 하면서 볼프강이 그렇게 흥분하는건 처음보는 일이었다. 과거 여러해동안 소립자물리학에서의 부분적인 질서를 다루지만, 전체연관과는 무관했던 모든 이론적 시도에 비판적이고 회의적이었던 볼프강은 이제 새로운 장방정식의 도움으로 커다란 연관을 정리해 내려는 의지를 불태웠다. 19장 통일장 이론 (1957~1958) 中

 

그래서 우리는 이런 실험적 결과에 맞는 다른 가정들을 찾아냈습니다. 이제 전체의 전자기역학을 양성자와 중성자의 교환이나 일반적으로는 아이소스핀 군과 달리, 세계의 비대칭성을 토대로 이해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따라서 통일장 이론은 관찰된 현상을 일반적인 연관으로 정리해내기 위해 당분간은 이런 부분에서 유연성이 많은 이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장 소립자와 플라톤 철학 (1961~1965) 中 뒤르의 말

 

<부분과 전체>에 기록된 대화들은 모두 하이젠베르크의 회고이다. 따라서 한마디 한마디 말들이 실제와는 꽤나 다를 수 있고, 또 그것들은 수많은 대화들 중 하이젠베르크 마음에 남았던 일부였을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보듯 ‘연관’이라는 단어는 1장 부터 20장까지, 즉 하이젠베르크의 10대부터 60대까지 평생에 걸쳐 등장하는데, ‘연관’이야 말로 그의 평생에 걸친 화두인듯 하다.

 

가장 널리 알려진 하이젠베르크의 대표업적은 불확정성 원리의 발견이다. 공교롭게도 하이젠베르크의 인생은 불확실과 혼돈으로 가득차있다. 그는 10대에 1차 세계대전을, 성인이 되어서는 독일 핵개발 프로젝트의 주요인물로서 2차 세계대전을 겪었다. 1,2차 세계대전 만큼이나 큰 혼란과 전쟁은 같은시기 과학계에서도 있었다. 그것은 고전역학으론 설명되지 않는 자연현상들을 두고 벌어진 물리학자들간의 전쟁이었다. 하이젠베르크는 그런 외적/내적 혼란 속에서 항상 ‘단순하고 커다란 연관’을 찾아 헤메었던 것 같다.

 

사람들은 보통 코펜하겐 해석을 골자로한 양자역학의 완성본을 놓고 배우지만, 그 지점에 도달하기까진 과학자간의 처절한 연구와 논쟁들이 있었다. ‘Old Quantum Theory’는 교육현장에선 거의 완전히 베제되지만, 그것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20세기 초반 과학자들의 깊은 고민과 좌절 그리고 혼돈을 맛볼 수 있다. 하이젠베르크는 그런 안개 속에서 ‘단순하고 커다란 연관’이 있다 믿었다. 놀랍게도 과학자들 또한 무언가를 믿는다[1]. 자연과 우주가 그런 아름다운 법칙들에 기반 할것이라는것은 과학자들의 ‘믿음’이다. 앞서 8장 내용으로 소개한 폴 디락과의 대화 중에서 하이젠베르크는 이렇게 말했다 :
 

나는 자연 속의 연관이 결국은 단순하다는 것을 굳게 믿었다. 자연이 이해할 수 있게끔 만들어져 있다고, 더 적절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사고 능력이 자연을 이해할 수 있게끔 만들어져 있다고 확신했다. 이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전에 슈타른베르크 호숫가를 걸을 때 로베르트가 했던 말에 근거했다. 그때 로베르트는 자연을 이 모든 형태로 조성한 질서를 부여하는 힘이 우리의 정신 구조, 즉 사고능력의 구조 또한 만들었다고 말했던것이다.

 

이 대화가 있었던건 1925년 하이젠베르크 인생의 가장 큰 성취가 있고난 몇년 후이다. 한치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자욱한 산을 오르며 수없이 좌절했지만, 결국 두발로 오르고 올르며 안개는 걷히고, ‘단순하고 커다란 연관’의 장관을 마주한 하이젠베르크 … 25세의 하이젠베르크의 ‘믿음’은 그렇게 더욱더 굳어져 갔을 것이다.

 

<부분과 전체>의 마지막 대화는 하이젠베르크와 아내 엘리자베트의 대화인데, 여전히 그들은 ‘연관’에 대해 생각, 걱정하고 있다 :

 

“젊은 세대가 커다란 연관과 관련한 어려운 문제들에 관심을 가질 거라고 생각해요? 간혹 당신들이 독일이나 미국에서 이루어지는 물리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으면, 젊은 세대는 거의 세부적인 것에만 관심을 갖는것 같은데요. 커다란 연관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거의 터부시되는 것 같았어요. 그러면 천문학이 시작되었던 고대처럼 되지 않을까싶어요. 겹쳐지는 원이나 타원으로 다가오는 일식이나 월식을 계산히는것으로 만족하고 그것을 뛰어넘어 아리스타르코스 의 태양중심설에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 상태 말이에요. 그러다 보면 당신들이 말하는, 보다 일반적인 문제들에 대한 관심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지 않을까요?”

 

나는 그렇게 염세적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기에 아내의 말에 약간 반박을 해보았다

 

“개별적인 것에 대한 관심은 좋고, 필요한 거지. 우리는 결국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알고자 하는 거니까. 닐스 역시 ‘충일함만이 명확함에 이른다’는 말을 즐겨 인용했다는거 알잖아. 게다가 난 터부시하는 일이 그리 나쁜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터부는 어떤 내용 자체를 금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조소나 허튼소리에서 그 내용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거든. 괴테는 터부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어. ‘아무에게나 말하지 말고, 현인들에게만 말하라. 대중은 금방 비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터부에 대해서는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게 좋아. 그리고 난 계속해서 커다란 연관들에 대해 생각하는 젊은이들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 마지막까지 충실하게 과학을 하고 싶다는 이유에서라도 말이야. 그렇다면 그런 젊은이들의 수가 얼마나 많은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1] 
 아인슈타인은 ‘
세상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고 말했다 한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가장 약한 중력에서부터 가장 강한 핵력까지 이해 할 수 있는건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다.

 

 지구/달/태양/은하의 운동을 기술하기 위해 전자기학이 필요치 않고, 전자와 핵의 운동을 기술하기위해 중력이 필요치 않다. 하지만 인간이 살고 있는 1미터 정도의 스케일에서는 중력과 전자기력이 모두 중요하게 작용한다. 우리가 지면에 서있을 수 있는것은 지구와 인간사이에 중력이 작용함과 동시에 인간과 지구를 구성하고 있는 원자들 사이의 전자기적 반발력이 이들을 각각의 개체로서 존재 할 수 있도록 분리시켜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행성보다는 미시적이지만 원자보다는 거시적인 스케일의 존재이고, 그 절묘한 경계인 ‘1m 세계’에 존재하기에 가장 작은 힘으로 묶여져있는 가장 큰 세계과 가장 큰 힘으로 묶여져잇는 가장 작은세계 모두를 이해 할 수 있는 것이다.